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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꿀 한 스푼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혁명

농이터 2020. 5. 11. 13:42



2019년에야 비로소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126주년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알아봐요!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학농민운동이란?

 

동학농민혁명, 동학 혁명, 동학 농민 운동이라 불리며,

 

1894(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으로,

18943월의 고부(백산) 봉기(1)

9월의 전주광주 궐기(2)로 나뉘어집니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점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는데요.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이다 보니

조선 전시대에 걸쳐 수탈의 대상이 되어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농민들은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894년 당시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은 굉장히 악랄한 탐관오리였고,

조병갑에 대한 백성들의

증오와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결국 견디지 못한 고부군민들은

그들 중 글을 쓸 줄 아는 전창혁을 대표로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전창혁이 곤장을 맞고 죽게 되자

이에 분노한 전창혁의 아들 전봉준이

봉기를 계획하게 됩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답사여행의 길잡이 1 전북)


전봉준이 주축이 된 봉기군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한다.’

전주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상경한다.’ 등의

계획을 담은 사발통문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조병갑이 익산으로 발령받으며

흐지부지되는 듯하였으나,

189419일 조병갑의 발령이 취소되고

고부로 돌아오자 1894111

전봉준은 사람들을 끌어모아 봉기를 일으켜

고부 관아 창고에 있던 곡식과 재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봉기군을 해산시켰습니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운동의 1차 봉기


조선 조정은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이용태를 파견하였으나

 

조정과 동학민들의 약속을 어기고

동학 교도들을 체포하거나

재산을 빼앗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에 전봉준은 김개남과 손화중을 포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1차 동학농민운동입니다.

 

그들은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였고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경군을 격파하며

전주성을 점령합니다.

 

전주성이 함락되자 조정은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해달라 요청하였고,

그에 따라 아산만에 청나라군이 상륙하게 되었는데요.

 

이에 일본도 조선에 대해 청나라와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

톈진 조약*을 명분으로 제물포에 상륙합니다.

 

그 후, 조정은 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맺어

전주성에서 해산시킵니다.

 

(*톈진 조약 : 일 양국 군대는 동시 철수하고

동시에 파병한다는 조약)


(사진 출처 : 나무위키>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

 

상황이 안정되었지만, 일본군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갑오개혁을

진행하자 동학군은 이에 분노해

2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키는데요.

 

10~20만 명의 동학 농민군이 결집되었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게되고,

보은 전투마저도 패배하게 됩니다.

 

(*우금치 전투 : 동학농민운동 가운데

가장 큰 전투로 공주 우금치에서 농민군과

조선, 일본 연합군이 벌인 전투)


(사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 결과 전봉준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며,

동학 농민 운동은 마무리됩니다.



(사진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홈페이지)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운동의 첫 시작은

농민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의 부패를

바로잡기 위함이었지만,

 

1894년 이후 의병 항쟁, 3.1 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운동의 근간이 되었으며,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 민족사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